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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른 중반,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2020. 3. 18. 23:52

    #1. 참을 수 없어 떠난 홀로 해수욕

     

    지난 여름, 8월 내내 매주말마다 바닷가엘 갔습니다. 그것도 혼자 말이죠.

    15년 만에 시작한 운전이 너무 재미있어서 어디든 가야 했거든요. 20살이 되자마자 땄던 면허증을 빛을 보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운전에 익숙해지는 데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험도 언젠가는 반드시 쓰게 되어 있다는 걸 운전하며 또 느꼈지요. 태국에서 미얀마에서 제주도에서 혼자 스쿠터를 타고 여행한 게 운전에 이토록 도움이 될 줄은 그땐 몰랐거든요.  

    미얀마에서, 태국에서, 제주도에서 갈고닦은 스쿠터 실력이 훗날 운전실력으로 발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가장 도움이 된 건 도로에 대한 두려움이 일찍 없어졌다는 겁니다. 

     

    여름의 절정, 주말 해수욕장은 사람으로 꽉 찼습니다. 처음엔 주변을 썩 많이 의식했습니다. 주변 모두 둘씩 셋씩 넷씩인데 나만 혼자 자리를 물색하고 돗자리를 펴고 수영을 하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하자니 한 번씩은 꼭 주변을 곁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나 보나 안 보나, 확인하는 거죠. 스리슬쩍. 

    어떤 날은 회사사람이든 누구든 나 아는 사람이 주변에서 나를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지인이 많지도 않고 발이 넓지도 않으면서 왜 이럴 때는 꼭 주변에 나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을까요? 꼭 연예인이라도 된 것처럼, 트루먼쇼라도 찍는 것처럼 말이죠. 

    누가 뭐라하는 것도 아닌데 왜 혼자 해수욕장에 가는 걸 두려워했을까요? 운전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어른이 된 것 같다'는 거였습니다. 운전 시작과 함께 시작한 홀로 해수욕을 하며 온전히 혼자가 되는 기분을,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서른 중반에 아직도 저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2. 말들에 치여 멍든 것 같은 날들을 뒤로 두고

    주변의 말도, 내면의 말도 삼킨 채 아래 나홀로

     

    혼자라 가장 어색하고 이상했던 홀로 해수욕 첫 번째 날에도, 그 순간만큼은 어색하지가 않았습니다. 돗자리에 누워서 책 읽는 순간이지요. 

    해수욕장 갈 땐 꼭 책을 몇 권씩 챙겨갔습니다. 읽다가 조금 쉬고 싶으면 수영을 했고, 또 책을 읽고 그러다 또 조금 몸에 물이 말랐으면 다시 수영을 하고 다른 책을 집어들어 읽고 하기를 반복하자면 한 권으로는 부족했거든요. 홀로 누워 있는 때양뼡 아래 바닷가에서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수영을 하자니 세상이 나로 가득차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 이외의 일들을 생각하느라 온종일 머리도 마음도 복잡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저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단한 말, 간절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지독한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서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 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완전한 제거는 없다.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편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_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121쪽 중에서

    말들에 채여 멍든 것 같은 날들이 있습니다. 실체 없는 말들은 보이지 않는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억누릅니다. 말들을 피해 숨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상들이 반복됩니다. 그 말들을 견뎌내어야, 나의 말로 굳건히 그 말들에 싸워 이겨야 돈은 보상처럼 대가처럼 얼마간 손에 쥐여지고 혼자의 삶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 지는 꽤 되었는데 읽지는 않은 채 책꽂이에 한참을 두었습니다. 혼자 해변으로 떠나기 전,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할 것 같아 가방에 넣었는데, 웬걸, 완벽한 선택이었습니다. 은유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말수가 적은 건 그런 이유일지도요. 예민한 편은 아니라 아픈 말들에 쉽게 다치지는 않지만, 제가 불편한 건, 저는 저의 바운더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가 더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여우 같은 사람이기보다 곰 같은 사람이라, 무디고 눈치가 적고, 행동이나 말도 느린 편이라 남들에게 허용하는 바운더리가 넓은 편이지만, 내 영역이라 선 그은 공간에 일단 넘어오면 신경이 곤두섭니다. 영역 동물이랄까요, 저는 전형적인 고양이과입니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이미 내뱉은 말을 일일이 떠올리니 하나같이 거짓말 같다. 자기 마음속 얘기를 전부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_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12쪽 중에서 

    제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남의 영역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말을 골라 하는 편이고 신중하게 하는 편입니다. 그의 영역에 함부로 말로 침범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러니 말수는 자연스럽게 더 적어지지요. 고르고 고른 말들도 마치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는 적당한 말은 아닌 것 같아 변명처럼 혼잣말처럼 되뇌이는 날들도 많습니다. 

    홀로 바닷가에 누워 있던 8월의 여름, 글을 읽던 때양볕 아래. 주변엔 온통 우리나라 사람뿐이고 한국어인데도 어느 순간 그들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 생각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말들에 채여 멍든 마음을 햇볕 아래서 하얗게 말갛게 소독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싸울 말들을, 감싸안을 말들을 받아들이고 또 내뱉으며 나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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