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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게도 관계의 선을 침범해주는 언니가 있었으면: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2020. 3. 20. 23:57

    #1. 첫째라는 이유만으로 싫은 건 먼저 하고 좋은 건 나중에 하고

     

    언니들을 좋아합니다. 어른스러운 동생들이 좋습니다. 철없는 동생, 동생 같은 언니, 딱 싫어합니다. 

    어릴 땐, 동생 둘 있는 첫째인 게 싫었습니다. 나는 모범 같은 거 잘 못하고 먼저 챙기지도 못하겠고 먼저 하는 것도 싫은데 첫째니까 해야 한답니다. 언니니까 잘해야 하고 누나니까 양보하랍니다. 나도 응석부리고 싶고 양보받고 싶은데 왜 첫째라는 이유로 싫은 건 먼저하고 좋은 건 나중에 해야 하나요? 그게 싫었습니다.

     

    한 살 어린 여동생은 지금 저에게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같이 자라며 서로의 단점과 장점을 잘 아는 우리들은 남에게는 못할 솔직한 말들을 하고 이해받을 굳건한 관계입니다. 

     

    한 살 어린 동생과 컴퓨터학원도 서예학원도 글짓기학원도 수영도 미술학원도 같이 다녔습니다. 동생과 내가 자매란 걸 아는 학원 선생님들은 내가 동생보다 못하면 꼭 한마디씩 토를 달았습니다. "동생이 더 잘하네" "언니니까 잘해야지" 한날 한시에 시작한 서예도 글짓기도 수영도 미술도 한 살이 더 많다는 이유만으로 잘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못할라치면 돌아오는 부당한 피드백은 묘하게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고 부담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나도 동생이었으면 못하는 건 당연하고 잘하면 2배로 추켜세워질 텐데, 왜 언니여서 못하는 건 2배로 창피당하고 잘하는 건 당연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자랄 때는 제가 언니다움, 누나다움을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언니다움을 요구하는 묘한 분위기를  막연하게 느끼며 자랐을 뿐입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래 외에 여러 스펙트럼의 나이대와 어울릴 일들이 많아지고나서는 끌리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언니들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 왜 언니들이랑 더 편할까" 생각해 보았더니, 나도 물어볼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고 챙김받는 것이 좋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언니들과 지내면 좀 모르고 못해도 용인되었습니다. 덜 하고 늦게 해도 이해해주었습니다. 아니, 그들이 이해해준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제 마음이 언니들과의 만남을 더 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언니들이랑은 나 이래도 되는구나 하고요.

     

    #2. 내게도 관계의 선을 침범하는 언니가 있었으면

     

    돌이켜보면 저 역시 뮤지션으로 달아오면서 '솔직하다'라는 말을 몇 번 들어본 적 있었지만, 그것은 그냥 전략으로서의 솔직함이었던 것 같아요. 난 나에게 유리할 때만 솔직할 것이다. 그런 심산만 제 기저에는 있고요. 저는 그냥 가끔 솔직해 보이는 가식적인 인간이고, 훌륭한 기저를 품으며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나 솔직하게 사는 일은 아직 저에게는 너무나 요원한 일이에요. 그런 저에게 언니가 보여주는 솔직함은 겉과 속이, 타인을 향할 때나 스스로를 향할 때나, 한결같이 분명해요.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져요. 저의 지척에 임씨 성을 가진 이토록 '앗쌀한' 인생선배가 있어서 저는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어요. _<여자로 사랑가는 우리들에게> 24~25쪽 중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읽으며 나도 솔직하게 툭툭 던져주는 언니 한 명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들수록 다른 사람들에게서 솔직한 피드백을 받는 게 어렵습니다. 관계의 선을 지키는 말들과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태도가 솔직함을 무디게 만듭니다.

     

    뮤지션 요조와 작가 임경선이 서로에게 쓰는 교환일기, 문자로 SNS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논쟁적인 이야기까지 서로에게 쏘아대던 두 사람이 이대로 묵혀두긴 아깝다 하여 책으로까지 엮여졌다고. 사회에서 이런 관계를 만든다는 건 행운이다.  

     

    저 역시도 타인들에게 그러니까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굳이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서로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모난 말은 숨기고 둥글고 둥근 말 돌리고 돌린 말만 하게 됩니다. 듣기 좋은 말과 하기 좋은 말만 골라 하는 관계만 쌓여가는 느낌이라, 겉으로는 친해 보여도 정말 친하다 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의 통일된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좇아가며 우리는 타인과 약속을 하고, 비행기나 영화 예매를 하고, 잘 시간을 정하고, 일어난 시간을 정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자기 인생에서는 제각각의 시계를 차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_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214~215쪽 중에서

    나이가 많다고 해서 어른스러운 것도,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동생같은 것도 아님을 이제는 잘 압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묘하게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숙한 사람도 만나봤고 나이가 열댓 살도 넘게 어리지만 배울 게 너무 많던 사람도 만나면서 언니다움이라든지 누나다움이라든지 그런 틀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10살 차이 나는 남동생과 같이 살면서도 딱히 살갑게 챙기지 않는 건 나이다움에 대한 부담감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엄마에게는 변명처럼 말해야겠습니다. 엄마랑 1시간 넘게 통화해야 하는 잔소리거리겠지만요. (끝)

    (+덧) 그런데 묘하게 빠져들어 읽히지는 않는다. 읽는 재미는 적다. 책으로 엮일 걸 미리 아는 편지라서 그렇단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을 대상을 독자에게 둔 건지 상대방에게 둔 건지 어중간하다. 묘하게 뒤섞여 있다. 독자를 의식한 것 같기도 하고 상대방을 향한 것 같기도 한 어중간한 지점이 글을 읽는 내내 이어지고 재미를 떨어뜨린다.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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