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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러진 물건들 속에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책 2020. 3. 5. 23:56
망원동 복작복작한 골목 끝, 30년 넘은 오래된 붉은 빌라 202호.
지하방 아저씨와 수도세를 반씩 내던 집, 빌라 계단 구석에는 주인 잃은 거미줄이 뭉쳐져 있고 그 위엔 검은 먼지가 가라앉아 있던 집, 보일러가 거실에 노출된 채로 설치되어 있어서 보일러를 틀면 온 집에 우우우우웅 하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던 집. 나의 30대 초반 2년 반을 보낸 집.
그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그 전에 월세로 살던 집이 있습니다. 2000에 45 하던 그 집 1층에는 장사가 썩 잘되는 감이 그려진 주황 간판의 24시간 감자탕 집이 있었습니다. 4층 건물 옥상에는 9개쯤 되는 원룸이 쪼개져 있었고, 저는 그곳 1호실에서 3년 반가량을 살았습니다. 4층 집으로 올라가려면 감자탕 냄새와 감자탕집 화장실 냄새가 뒤섞인 요상한 냄새를 늘 통과해야 했습니다. 요상한 냄새의 중심부를 통과하여 3층에 다다르면 뭘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는 몇 개의 사무실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속에선 술 취한 아저씨와 바둑 두는 아저씨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복도로 울려퍼졌습니다.
집, 아니 방이라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싱크대가 딸려 있고 어울리지 않게 큰 화장실이 딸린 7평 남짓한 공간이 있었으니까요. 7평의 그 방에 살 때는 손을 뻗으면 책이 있고 옷이 있고 컴퓨터가 있었습니다. 물건을 둘 공간도 충분치가 않으니 뭘 사놓을 궁리는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살다가 방이 3개 딸린 30년 넘은 붉은 벽돌 빌라로 이사를 갔는데, 왜 그렇게 집이 크게 느껴지던지요. 그래봐야 겨우 15평 남짓한 그 집에 나 하나 들어가 산다는 게 무슨 호사처럼 느껴졌습니다. 원룸은 사람을 그렇게 작게 만듭니다. 나 같은 거에게 이런 게 가당키나 하냐고, 나라는 존재를 하찮게 만듭니다.
7평에서 15평으로. 두 배나 공간이 넓어지고 방도 생기고 작지만 거실도 생기니까 왜 그렇게 뭐가 사고 싶었을까요. 책장 하나 없이 100권도 넘는 책을 빨간색 노끈으로 묶어 보관하다 책장을 사서 채워넣고, 책상을 사고, 소파를 사고, 의자를 사고, 캐비넷을 사고, 화분을 사고, 커텐을 사고, 램프를 사고, 액자를 사면서 집을 채워넣기에 바빴습니다. 그렇게 넓기만 하던 집도 순식간에 물건으로 가득 찼습니다.
글을 좀 적나라하게 썼지만 고양이를 나쁜 공간에서 키운 건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기 위한 변명의 사진. 중성화한 후라 고깔을 쓰고 있는 제피. 늘어난 물건들은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집을 뒹굴었습니다. 피라미드 같이 쌓인 물건들 사이로 신난 건 고양이뿐입니다. 고양이 털이 뭉쳐져 방을 떠도는 나머지 커다란 공기청정기를 24시간 켜두었습니다. 필터는 금방 더러워졌지요. 방 하나는 서재로, 방 하나는 옷방으로, 방 하나는 침실로 쓰자던 처음의 계획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방 세 개는 모두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나뒹구는 정체 모를 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살던 2년 반 동안 저의 일과는 대강 이랬습니다.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4캔에 만 원하는 수입 맥주와 달달한 과자와 빵을 사서 집앞 단골 돈가스집에서 돈가스를 포장해 갑니다. 옷을 대강 행거에 걸쳐두고 세탁기가 한 켠에 자리한 세면대 없는 추운 화장실에서 샤워를 합니다. 노트북으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커다란 맥주 4캔을 순식간에 들이켭니다. 평일에는 4캔을 다 마시고 겨우 만족한 채 잠이 들겠지만, 주말을 앞둔 날이라면 그걸로도 부족해서 취한 채로 편의점에 뛰어가곤 했습니다.
정돈되지 않은 물건의 홍수 속에서, 지저분한 공간과 함께 저 자신도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버리기 전까지 말이죠.
누구나 행복해지길 원한다. 하지만 그렇게 간절히 원해서 손에 넣은 물건으로는 아주 잠깐 동안만 행복할 뿐이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것이 없다. 물건을 줄이는 일은 행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일이다. _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378쪽 중에서
동료애와 동질감. 일본 출판사 편집자인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저자의 이야기는 꼭 제 이야기를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온갖 물건으로 뒤엉킨 집에서 비참한 자기를 잊기 위해 맥주 캔을 비우고 와인을 비우고 술에 취해 살았다는 고백을 읽을 때는 당장이라도 이 사람한테 메일이라도 쓰고 싶었습니다.
"아니, 편집자의 30대는 다 이런가요?"
주변의 동료에게 서른 초중반의 당신도 비참한 자기를 외면하고 싶어서 술에 찌들어 살고 집이 책으로 물건으로 뒤엉켜 엉망진창이냐고, 당신도 혼자 술 마시다 취해서 술을 더 사러 편의점 뛰어가는 날들이 반복되냐고 차마 부끄러워서 물을 수는 없으니 이 사람한테 메일로라도 물어보고 싶은 거죠. 아, 이 사람 곁에 있었다면 아픈 동료애를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니겠죠. 곁에 일하는 동료에게 이런 각자의 비밀을 드러냈다가는 언제 어떻게 나의 치부가 되어 돌아올지 모르니 마음 속 깊숙이 묻어둘 뿐이죠.
누군가 내게 말했다. "물건을 버렸을 뿐이면서!" 분명 나는 물건을 버렸을 뿐이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물건을 줄인 후 나는 매일 행복을 느낀다. 행복인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_<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36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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