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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는 완벽해야 한다는 편견: <엄마는 페미니스트>책 2020. 3. 13. 23:56
나는 페미니스트 대열에 감히 낄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쉽사리 넘어서지 못하는 공고한 이론을 알아야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페미니스트는 무언가 특별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독특한 주장을 하는 것 같았고, 그 논리를 나는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권리 신장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감히'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왠지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우라가 있어 보였습니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요. 어려운 논리와 이론으로 무장해야 비로소 될 수 있는 것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페미니스다"고 쉽사리 말 꺼내지 못하기도 했지요. 그러고 나면, 일상 속 복잡한 상황들에 일일이 대응할 수 있는 논리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두려움이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될 용기를 하기라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제안들을 던지지요. 어떤 법칙이나 이론이나 일관된 주장이 있어서 그것에 따라야만 나도 페미니스트 대열에 낄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거지요. 일상 상황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뭔지 확신하고 있어야 페미니스트 대열에 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런 제 편견을 깨준 책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입니다.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언제나 맥락과 관계가 있어. 절대 불변의 법칙 같은 건 없지.
그러면서 그래도 꼽아보라 한다면 두 가지 전제를 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나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것으로 끝. 다른 수사 여구는 필요 없어. (...) 두 번째 도구는 이 질문이야. 00를 반대로 뒤집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가?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는 거지요.
특별한 이론으로 무장할 필요도, 완벽할 필요도 없음을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어느날 친구에게서 질문을 받습니다. "딸을 페미니스트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이지요. 그 질문에 저자가 처음 든 생각은 '모르겠다'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말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용기를 내봅니다. 친구의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 거지요.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기 위한 열다섯 가지 방법을 담고 있습니다. 작고 얇지만 분명한 어조로 쓰였습니다.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꼭 그 대상이 아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적 차별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태도가 올바른지 헷갈려서 여전히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여성의 권리 신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겠다면 이 책 속 짧지만 분명한 열다섯 가지 방법은 분명한 방향키가 되어 줄 거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작지만 강한 책. 얇지만 분명한 어조로 가득한 책. <엄마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특별한 이론을 공부할 필요도, 논리로 무장할 필요도 없음을 이 책을 보고 나면 깨닫게 됩니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이라는 장벽을 굳건히 세우고 고고한 어떤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닌,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므로, 이 책 속 열다섯 가지 제안들은 독특하고, 어렵고, 논리적이고, 이론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편적이고 일반적이지만 쉽사리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는 바가 많지요.
열다섯 가지 제안 중 특히 인상 깊었던 법칙은 3가지입니다.
일곱 번째 제안. 결혼을 업적처럼 이야기하지 말 것.
"결혼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결혼하면 여자 팔자 달라진다" 케케묵은 구호같은 이 말들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합니다. 부자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쉽게 신분상승 할 수 있으리라는, 다른 노력하지 말고 결혼 잘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오래된 신데렐라 이야기들.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 하자 있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시선들 말이지요. 이런 시선이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만연하다는 것은 위안이 되어야 하는 건가요, 서글퍼해야 하는 건가요?
이런 말들이 만연한 사회에 태어나 그런 방식의 말들이 안개처럼 스며들어 있는 배경 속에 자란다면, 공공연히 결혼이 신분 상승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면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자립해 살아간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만약 결혼을 업적으로 삼고 결혼으로 다른 삶을 꿈꾸며 실제로 그렇게 해낸 사람이 주변에 있다 한들 그 한 사람을 나쁜 시각으로 보거나 비난할 수 있는 문제인 걸까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로 사람을 다루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건 몇 사람의 선택과 행동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결혼은 업적도 아니고 치잘룸이 열망해야 하는 것도 아님을 확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결혼은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지만 업적은 절대 아니야. _<엄마는 페미니스트> 57쪽 중에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페미니스트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건 어려운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독서를 가르치는 것, 함께하도록 가르칠 것, 차이에 대해 가르칠 것 등 건강한 어른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건 남성이든 여성이든 주체성을 가진 건강한 마음의 사람이 되는 것, 그것과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여덟 번째 제안. 호감형 되기를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네 딸에게는 절대 이런 부담을 주지마. 우리는 여자애들에게 호감형이 되라고, 착한 애가 되라고, 속마음을 숨기라고 가르쳐. (...) 많은 여자애들이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굴기 위해 애쓰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해. 많은 여자애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기분'을 배려해. 이것이 호감형 추구의 끔찍한 결과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숨도 마음껏 내쉬지 못하는 여자들로 가득해. 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남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정해진 모양에 자신을 욱여넣으라고 배워왔기 때문이야. _<엄마는 페미니스트> 61쪽 중에서
"좋아하니까 괴롭히는 거야" 여자아이에게 이 말은 폭력입니다. 남자아이에게는 잘못된 가르침이겠죠. 좋아하면 잘대해 줘야 합니다. 괴롭히는 게 좋아하는 거라고 가르침받아 자란 여자아이는 커서도 헷갈릴 겁니다. 아무리 난폭한 폭력을 받는 상황 앞에 놓여도 좋아하니까 저러는 거니까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겠죠. 그리고 그런 난폭한 사람에게조차 호감형 사람이 되려 노력하겠죠.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요.
모든 사람의 호감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요. 그 주체와 대상이 모두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을 때 건강한 관계맺음이 가능할 것입니다.
감각적인 일러스트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배가 됩니다. 책이 얇은데다 아이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니 일러스트는 필수적 선택이었지 싶습니다만, 이 일러스트 작가의 그림을 선택한 건 탁월한 선택 같네요. 열 번째 제안. 아이의 일, 특히 외모와 관련된 일에 신중해질 것.
아이가 화장을 좋아하면 화장하게 해. 패션에 관심이 많으면 옷을 차려입게 해.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으면 또 그런 대로 내버려 둬.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기 위해서는 여성성을 거부하도록 강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 페미니즘과 여성성은 상호배타적이지 않아. 상호배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여성 혐오적인 생각이야. _<엄마는 페미니스트> 72쪽 중에서
여성적이라 불리는 무언가로 치장하거나 차려 입으면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할 줄만 알던 때도 있었습니다. 화장이라고는 하지 않고, 바지만 입고, 티셔츠와 남방만 입어야 할 것 같은. 그런데 저자가 앞서 말한 두 가지 전제 중 하나인 반대로 생각하기를 해보면 답은 쉽게 나왔습니다. 남성은 자신이 잘 차려 입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그의 지능, 능력, 진지함에 대해 단정 내릴까 봐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성은 반대지요. 밝은색 립스틱이나 짧은 치마를 입으면 도덕적으로 천박하거나 충분히 똑똑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있습니다.
저자가 '외모와 관련된 일에 신중해지라'고 말하는 것에 핵심은 아이의 외모와 도덕성을 연결 짓지 마라는 데 있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는다고 해서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와 옷차림에서부터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세우고 도덕적으로 판단하도록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지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키우라는 겁니다.
저는 엄마도 아니고, 결혼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은 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지만 각각의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헷갈리고 잘 모를 때가 많아서입니다. 아이에게 가르침의 기준을 삼을 수 있는 정도라면 제 내면의 불완전한 페미니스트를 키우기에도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기대만큼이나 이 책 속 분명한 어조는 우리 내면에서 매번 길을 헤메는 페미니스트를 키우기에 적합한 지침이 되어줍니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 헷갈리고 혼란스러운 건 당연한 거고 또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과 함께 책은 마무리가 됩니다. 완벽한 마무리지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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