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상처받겠다는 용기 <독고솜에게 반하면>

본질적자유 2020. 3. 10. 23:14

#1. 쉽사리 친해질 수 없던 비밀스러운 그 아이,

누구에게나 있는 학창시절 기억의 한 조각

 

교실 바닥 나무냄새.

복도로 난 창문 틈 사이 비치던 햇살. 의자 끄는 둔탁한 소리. 선생님 몰래 주고받던 쪽지. 그리고 알고 싶던 그 아이의 옆모습. 이 모든 것들의 냄새가, 기억이, <독고솜에게 반하면>을 읽는 내내 주변을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나'인 율무는 자칭 탐정입니다. 관찰하고 묻고 궁금해하기를 멈추지 않죠. 어떤 이에게는 궁금할 게 전혀 없는 교실 뒤편 1년 내내 걸려 있는 같은 반 아이들의 자기소개 글이 율무에게는 한 사람을 알아가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는 기회란 멀리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늘 곁에 있는, 당연한 그것이 단서가 되고 기회가 되는 것 같으니까요. 

 

저에게도 왠지 신비롭던 같은 반 아이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두 학기 내내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그 아이의 방과 후는, 일상은 나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집중할 때면 특히 수학 문제를 풀 때면 입에 힘을 주고 한쪽으로 몰던 버릇까지도 왜인지 기억이 나지만 좋아하는 게 뭔지, 가족은 어떤지, 자주 가는 곳은 어디인지, 사소한 것들조차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같은 반 빼곡한 많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것 같다 싶어서 관심이 갔을 뿐인지도 모르죠. 그 아이에게도 독고솜 같은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2. 표지 일러스트와 제목을 보고 착각할 뻔했지만 아니었네요

 

표지 일러스트와 제목을 보고 청소년 퀴어 소설인 줄 착각했습니다. 소녀와 소녀의 사랑을 다루는 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래도 눈길이 가서 자주 쳐다보고, 말을 걸어보고, 장난도 쳐보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우정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었다 뭐 이런 이야기 말이에요. 그러기 충분한 표지와 제목 아닌가요? 하지만 내용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탐정 소녀와 마법 소녀의 우정, 소위 반에서 '짱'인 아이와(짱이라니 나이가 드러나는군요) 짱을 보필하는 소위 2인자 아이 간의 속고 속이기, 조용하지만 알고 보면 영특한 아이와 친구라곤 없을 것 같은 그 아이의 단짝 친구 사이의 비밀스런 우정, 손바닥 보듯 빤한 작은 동네 엄마들의 앞말과 뒷말들.

 

<독고솜에게 반하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하나를 그려 보았습니다. 독고솜은 마법을 할 줄 압니다. 대단한 마법은 아니고요,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해프닝들을 일어나게 하는 정도인데요. 특히 집앞 마당에서 고양이들을 둥둥 떠나니게 한 뒤 함께 노는 장면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 집 고양이 제피도 날아오른다면 정말이지 좋아할 것 같거든요.

 

청소년 시절 우리의 모든 것이었던 작은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같은 반 아이들의 관계 문제가 유쾌하게 이야기되는가 싶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판타지적 요소가 퐁퐁 하고 터집니다. 누구의 눈길이든 사로잡는 비밀스러운 그 아이, 독고솜이 사실은 마법을 쓸 줄 아는 아이라는 것이죠. 

이 책을 구매하고 읽게 된 과정은 이렇습니다. 표지와 제목을 보고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뭐야, 이 책" 청소년 퀴어 소설인 줄 알았으니까요. 클릭을 하고 상세 설명을 보다 카피 하나에 홀린 듯 구매 버튼을 눌렀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건 아닐까'. 

 

#3. 사회생활을 할수록 줄어드는 건 타인에 대한 관심

 

저는 딱히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정확히는, 저와 관련이 없는 타인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회생활을 한 지도 어언 10여년, 워낙에 개인주의적 인간인 저이기도 했지만 쌓인 연차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무관심도 강해져 갑니다. 사회생활이란 물에 고고히 떠다니는 백조 같은 날들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저는 종종 합니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아무런 일 없는 듯하지만 사실 수면 아래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온힘 다해 휘젓는 다리가 있듯, 사회에 던져진 사람들도 첫 사회생활의 몇 달 혹은 몇 년간 마음고생 몸고생이 겉으로 드러나지만 연차가 조금만 쌓이면 백조 같은 날들이 이어집니다. 평온한 듯 떠다니지만 마음속엔 회오리바람이 부는 거죠.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전화소리, 회의 소리, 보고하는 이야기, 일과 관련된 이런저런 일들이 오고갈 뿐이지만 수면 아래로는 온갖 뒷말들이 시끄럽게 오갑니다. 이런 가십들에 크게 관심 가지지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다 알게 되었다 해도 나만 알 뿐, 더 이상 퍼뜨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가십은 퍼지고 퍼지고 퍼져서 확대되고 부풀려져야 하는데 관심도 없고 이야기가 더 퍼지지도 않으니 가십의 통로에서 저는 대게 빠져 있습니다. 

 

먼저 다가간다는 용기. 기꺼이 상처받겠다는 그 용기가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의 풍파가 더는 싫어서 타인에 대한 관심마저 꺼뜨려버린 제가 안쓰럽게도 느껴집니다. 

 

각자가 각자의 할 일을 제대로 하면 모든 일은 제대로 되게 되어 있다는 게 저의 기본 신조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일까지 일일이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해의 말들에 상처받고 마음 아픕니다. 많이도 그래 왔습니다. 눈물 쏟고 답답해하며 참 많은 날들은 상처받으며 지내와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구요. "하지만 어쩌겠어?"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서 해명할 게 아니라면 나는 나의 할 일을 할 뿐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도 오해를 풀든 어쩌든 하겠지요.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말자고, 신경을 끄자고 생각합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땐 일부러 신경을 끄려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독고솜에게 반하면>을 읽다 보니, 내가 놓쳐버린 타인의 이야기들에서 나 또한 확장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더 괴롭고 싶지 않아서, 마음 아프고 싶지 않아서,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외면해왔던 한 사람의 이야기들에 조금 더 다가가려 노력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더 상처받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하고 신경 꺼 왔지만, 그 풍파들 속에서 나도 조금씩 성장해온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그 깊고도 우울했던 마음고생의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음이 나를 외면의 길로 안내했지만, 이제는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그리 상처받지 않을 수 있겠단 자신감도 조금은 생긴 것 같거든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