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을 깨우는 일: <라틴어 수업>

본질적자유 2020. 3. 23. 23:33

#1. 쓸모 같은 걸 걱정했다면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겠죠

 

제 전공은 철학이고, 복수전공은 역사입니다.

취업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는 인문학과를, 그중에서도 철학이나 역사 같은 걸 전공한 저지만, 원래 전공은 이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20살에 들어간 첫 번째 대학에서의 전공은 컴퓨터공학이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취업이 잘된다 하니 성적에 맞춰 어찌저찌 들어간 컴퓨터공학과가 몸에 맞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선택으로 인해 2년이나 늦게 대학에 다시 입학했습니다. 선택이라는 것, 인생의 결정을 한다는 게 나를 어떤 곳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걸 그때의 결정으로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과였던 저는 컴퓨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쩐 일인지 컴퓨터동아리 같은 델 들어가 이런저런 활동을 했더랬습니다. 우습게도 컴퓨터는 전혀 몰랐습니다. 동아리 시간에 컴퓨터실에 모여서 게임이나 하고 축제 때 게임 대회 같은 걸 하며 놀 궁리밖에 안 했는데, 대학 학과를 정할 때가 되니 취업도 잘된다 하고 수능점수도 맞기에 넣은 컴퓨터공학과엘 어찌저찌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학과가 적성에 맞을 턱이 없지요.

1년가량을 다녔지만 도무지 이걸 무기로 앞으로 계속 밥 벌어먹고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었고, 1년 동안 놀다 공부하다를 하다 22살에 두 번째 대학엘 들어갔습니다. 글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사색하는 것도 좋아하던 저는 다시 공부를 하며 인문학에 흥미를 느꼈고 인문학부로 입학하게 되었지요.

쓸모 같은 걸 생각했다면 다시 대학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을 때 인문학 같은 걸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철학이라니요, 당장 쓸 궁리를 할 요량이었다면 이런 전공을 선택해서는 안 되었지요.

 

#2.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을 깨우는 일

 

제가 철학을 선택한 건 단순히 가장 재미있어서였습니다. 모든 학문의 뿌리라는 철학을 배운다는 게, 그 생각의 과정을 엿본다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나름의 살 궁리는 하면서 두 전공을 선택했었거든요. 두 번째 들어간 대학이라 동기들보다 두 살이나 많다 보니 1학년 때 마냥 탱자탱자 놀 수만은 없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는데, 덕분인지 교직이수 자격증을 받았고, 역사도 교직 복수전공을 한 덕분에 취업에 있어서 최악의 선택은 피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교사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요. 

만일 여러분이 뭔가에 관심이 생기고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내가 왜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왜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한번 들여다보세요. 그 다음 내 안의 유치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거나 부끄러워하기보다 그것이 앞으로 무엇이 될까, 끝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요? 지치고 힘든 과정에서 오히려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어주지 않을까요? 그러니 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의 그 마음이 그저그런 유치함이 아니라 '위대한 유치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_<라틴어 수업> 26쪽 중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의 변호사로 임명된 한동일 저자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서강대학교에서 진행했던 강의를 책으로 옮겼다.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를 통해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 사회제도, 법, 종교 등 당시의 삶의 지혜를 오늘의 우리가 엿볼 수 있도록 한다.

 

처음 제가 인문학 같은 걸, 그것도 철학 같은 걸 전공하겠다 마음 먹었을 때도 왜인지 이상하게도 미래가 불안하거나 초조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선택에서 적성에도 맞지 않고 배울 수록 괴로웠던 전공을 해보니, 자기가 가장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걸 선택하는 게 가장 주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취업 같은 건 나중에 졸업할 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대책 없는 마음도 있었지요. <라틴어 수업>에서는 뭔가에 관심이 생기고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 마음은 그저그런 유치함이 아니라 '위대한 유치함'이라 합니다. 배움의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부끄러워하기 보다 끝내 무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상상해보는 과정에서 또 다른 동기부여가 생겨난다는 거지요. 철학을 선택할 때 22살의 제가 바로 그런 '위대한 유치함'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3. 과거를 그리고,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소모하는 일

 

인간은 오늘을 산다고 하지만 어쩌면 단 한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와 오늘을 비교합니다. 미래를 꿈꾸고 오늘을 소모하죠. 기준을 저쪽에 두고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그때보다, 그때 그 사람보다, 대학 가면, 취직하면, 돈을 벌면, 집을 사면 어떻게 할 거라고 말하죠. 재미있는 것은 우리만 그런 건 아니라는 거예요. 1강에서 소개한 라틴어 동사 활용표를 한 번 살펴보세요. 과거와 관련된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 시절의 로마도 다르지 않았다는 의미일 겁니다. _<라틴어 수업> 164쪽 중에서

후회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지나고 나서 꼭 왜 그랬을까, 그때 그랬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곱씹는 게 꼭 버릇 같이 하루의 일과 같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버릇이 없어졌습니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기억할 것도 스쳐간 사람도 경험한 것들도 쌓여가서 그 많은 것들을 일일이 반추해내며 곱씹을 여력도 체력도 안 됩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너무 생각과 후회 속에 살아야만 할 겁니다. 선택한 결정, 내뱉은 말, 지나간 일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꾸만 생각이 날 땐, 술로 도피하려 한 날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다른 생산적인 일들로 마음을 돌리려 애씁니다. 달리기를 하고, 매일 글을 쓰면서 조금씩 자리잡은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언어를 배운다는 것, 사라져가는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하여 후회하는 삶을 살기보다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여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는 삶이 더 멋지지 않을까요?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산 사람의 내일이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_<라틴어 수업> 164쪽 중에서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사장된 언어, 쓸 일도 없고 쓰는 사람을 본 적도 없는 언어 라틴어를 배운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대학에서 인문학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철학이나 역사를 전공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내 안에서 무언가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을 배운다는 건,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우리 안의 위대한 유치함을 깨우는 일일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떤 삶으로 이어질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하여 과거를 후회하기보다 하고 싶은 것을 배우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는 일이 더 멋진 삶 아닐까요? 제가 이렇게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제가 철학을 전공할 때는 전혀 몰랐던 일이니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