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도 슬픔도 반짝, 일상의 재발견 : <일의 기쁨과 슬픔>

본질적자유 2020. 3. 22. 23:48

#1. 인세 받는 게 즐겁다, 돈이 중요하다 

스스럼없이 말하는 젊은 작가들

 

소설가들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고, 돈보다 예술을 추구할 것 같고, 칩거에 능하고, 묘하게 힘이 없는. 그런데 요즘 젊은 소설가들을 보면 이런 이미지와 정반대편에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럼없고,  예술만큼 돈이 중요하고, 활기찬 것 같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가들을 접할 매체가 신문 아니면 잡지 정도였기 때문일까요, 그들은 얼굴을 매스컴에 보여주는 것보다 글로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글 외엔 좀처럼 공적인 자리에서 만날 수 없는 그들은 신비한 공기가 감싸고 있는 것 같았죠.

 

말 없고 쉽게 다가갈 수 없고 자기만의 벽이 공고할 것 같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작가에게는요. 하지만 요즘 젊은 작가들을 보면 이런 편견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튜브를 필두로 한 영상 매체가 발달했기 때문일까요,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이들의 성향 때문일까요, 요즘 젊은 소설가들은 크고작은 매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스스럼없고 말투나 행동도 친근하고 활력이 넘칩니다. 생활력도 강합니다. 예술을 추구하며 배 곪으며 글 쓰는 삶보단 소설이 안 될 수도 있으니 플랜A, 플랜B를 열심히 세워두고 예술할 수 있는 삶의 토대를 열심히 마련합니다. 그런 자신을 당당하게 이야기하죠. 인세 받는 게 어떤 때보다 즐겁다, 돈 벌기 위해 글 쓴다, 는 말을 하는 것도 스스럼 없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서사보다 쉬운 구조와 읽기 쉬운 말들로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혹자는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하지만, 어렵고 복잡한 서사를 가져야 작품성이 높고 쉽고 가벼운 서사를 가졌다 해서 작품성이 낮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소설과 독자들 사이를 멀게 하는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2. 불안하고 힘겨운 일상이지만 그럼에도 반짝이는 우리들의 이야기

 

근래 몇 년간 소설시장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국내 소설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약 스타처럼 떠오른 젊은 작가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 독자들이 큰사랑을 보내고 있습니다. 장류진 작가가 힘겨운 젊은 세대의 아픔을 세심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그럼에도 반짝이는 순간들을 포착해내기 때문이겠지요.

육교도 아니고 다리도 아닌 게 거리 위에 있네요. 올라도 힘만 들뿐 결국 다른 곳에 가닿지 못하는 저 다리를 오르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표지 이미지네요. 약간 이라도 높은 곳에 오르면 경치가 달리 보이는 걸까요, 아니면 저 건너편에는 다리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다른 게 있는 걸까요?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박상영 작가도, 창비신인상을 수상한 장류진 작가도 직장에 다니며 생계를 위한 돈을 벌면서 틈틈이 글을 써 등단에 성공했다 합니다. 불안하고 상처받고 힘겨운 일상 깊숙이 던져져본 작가들이기 때문에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지내는지 그 일상에서의 반짝임은, 공감은, 슬픔은, 기쁨은, 아이러니는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현실적이고 솔직하게 표현된 이야기는 젊은 독자들이 '우리 이야기'라 느끼기 충분합니다. 

장류진 작가는 회사 다닐 때 마케팅 관련 일들을 했다 합니다. 마케팅이라는 게, 사람들의 심리를 움직여 결국 상품을 구매하게 하거나 원하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거인데, 장류진 작가의 글이 사람들의 심리를 무겁지 않으면서도 유쾌하게 움직이는 건 그런 이유도 한몫을 했을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자신을 짓누르는 외부의 압력 아래서도 어느 몫의 자유와 행복만큼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의 활력과 당당함을 형상화한 듯한 인물들이 이 매력적인 소설집 전체를 아우르는 주에와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 _ <일의 기쁨과 슬픔> 출판사 서평 중에서

 

#3. 8개 단편 소설 중에서 첫 번째 소설 <잘 살겠습니다>가 가장 좋았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8개의 단편소설이 실렸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첫 번째 소설 <잘 살겠습니다>가 가장 좋았습니다. 결혼식을 3일 앞둔 날, 3년간 교류가 없던 직장동료 빛나언니의 연락을 받고 청첩장 약속을 잡으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묘하게 눈치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빛나언니에게 주인공 '나'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는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_<일의 기쁨과 슬픔> 28쪽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묘하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업무로 영향을 끼치지 않거나 상당하게 친하지 않는 이상은 굳이 나서서 그런 것들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알려준다고 바뀌지도 않고요.

 

사회에 나와서도 묘하게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직장생활이란 게, 업무도 아니고 나한테 피해를 주지도 않고 상당히 친하지 않은 이상 굳이 나서서 세상은 그런 게 아니다, 이게 맞다, 저건 틀렸다 일일이 참견하지 않습니다. 그냥 특이한 사람 정도로 적당한 거리를 둘 뿐이지요. 그리고, 그런 걸 알려준다 한들 사람이 바뀌지도 않고요. 괜한 감정만 상할 뿐이지요. 

하지만 나와 좀 다를 뿐, 그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겁니다. 허투루 설렁설렁하기 때문에 세상물정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게 아니라, 단지 눈에 보이지 않거나 말해지지 않는 것들에는 익숙하지가 않은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실패해서 마음 아파본 적이 없거나 적고,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다시 빠져나와 보려고 마음고생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말해지지 않는 세상의 언어를 모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나'가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도 빛나 언니는 나름의 방식으로 느리고 천천히 배우게 되겠지요. '나'가 말하는 세상의 원리를 말이에요. 

86년생 작가가 그려내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저와 같은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다음 이야기에 공감할 마음의 준비는 이미 끝마쳤습니다. (끝)